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문단 편집) === [[이집트 원정]], 그리고 제2차 이탈리아 전역에서 === 이탈리아 원정에서 나름대로의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있던 드제는 임시적으로 '''"Army of England"'''[* 영국군이 아니라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은 나폴레옹이었는데, 병력은 5만 명에 달했고 '''서류상으로는''' 함대도 제법 그럴싸했으며, 나폴레옹의 주도로 아일랜드의 반영 감정을 이용한 전략구상도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해군의 실상은 처참한 수준이었고, 이탈리아 전쟁의 성공으로 주목받던 나폴레옹을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던 총재 정부의 의도도 작용한 정략적인 작전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영국 원정을 위해 조직했던 참모집단과 정예부대를 이집트 원정군으로 전환시킨다.]의 사령관직으로 지목되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폴레옹에 의해 이집트 원정군에 소속되어 이집트를 향해 출발했다. 그의 사단은 이집트 일대를 주름잡고 있던 [[맘루크]]군의 공격을 받았지만(피라미드의 전투) '''곧 쳐바르고''' 별동대를 이끌고 나일 강 상류로 올라가 무라드 베이(Murad Bey)마저 두들겨 팼다. 이 일로 인해 상이집트에 있던 농부들로부터 '''"정의의 술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줄 함대가 아부키르에 정박하고 있던 중에, 하필이면 [[호레이쇼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에게 '''함대가 완전히 박살이 나면서'''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이집트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근성남 [[프란츠 2세]]는 '''"기회다!"'''를 외치며 이 기회에 잃어버린 땅 좀 찾아보자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국내의 여론마저 그다지 좋지 않은 낌새가 느껴지자, 식겁한 나폴레옹은 일단 급한대로 자신과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일단 프랑스로 빨리 돌아왔다.[* 이때 드제도 수행원 중 한명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되고서 한달이 지난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아직 남겨진 1만 5천여명의 프랑스군은 어찌 빼낼 방도가 없었다. 나중에 드제에게서 클레베르에게 지휘권이 넘어가자, 클레베르가 영국 함대의 장교인 시드니 스미스와 엘 아리쉬의 테이블에 앉아 어찌어찌 교섭을 시도했지만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자 클레베르는 할 수 없이 '''오스만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6:1'''의 전력차를 극복하고 헬리오폴리스에서 '''오스만 군대를 쳐바른 뒤 다시 카이로를 재점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당하고, 이듬해인 1801년에 오스만 군대에 항복한 뒤에야 프랑스군은 귀환할 수 있었다.] 그 때 나폴레옹은 총재정부를 갈아엎고 통령정부를 세운 뒤 자신이 제1통령에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드제는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다. 그리고 마침 거의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았던 오스트리아가 근성으로 다시 일어나 북이탈리아를 빼앗으려 들자 나폴레옹은 건방진 오스트리아를 다시 한번 밟아주기 위해 1800년에 [[제네바]]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5월에 군대를 출발시키게 되는데 드제도 나폴레옹 휘하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즉시 두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군단을 지휘하여 제노바를 제압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드제는 행군 중 리발타쪽에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었는데, 마침 나폴레옹의 참모장교가 지나가던 길이라 그를 불러 정황을 알아본 뒤, 곧바로 부대를 재편, 드제 스스로 분견대를 조직하여 부대와 함께 빠른 길로 해서 마렝고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마렝고 전투|마지막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